10-1 유관순 (본문)

10-1 유관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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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순은 1904년 3월 15일,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지령리에서 태어났다. 대를 이어 이 마을에서 살아 온 유관순의 아버지는 선견지명이 있는 선비였다. 그는 청소년들을 잘 가르쳐야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관순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서울로 보내기로 했다. 그리하여 유관순은 서울에 있는 이화 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때가 1916년이었다.
  이 무렵 우리 겨레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여러 가지 고난을 겪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온 겨레가 마음을 합하여 일제히 독립을 외치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날, 유관순도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사람들은 저마다 태극기를 들고 남녀노소가 한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유관순과 친구들도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튿날 일본은 이화학당의 문을 강제로 닫게 했다. 그래서 기숙사의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유관순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한 만세시위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독립만세를 부를 준비를 하였다. 유관순은 교회와 스승들의 도움을 받아 동지들을 모으고 독립만세를 부를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나이 어린 소녀로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지혜와 용기로 일을 추진하였다.
  드디어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한 날이 왔다. 그 날은 그 고장의 장날이었다.아침부터  장터에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보통 때의 몇 갑절이나 되었다. 정오가 되자 유관순의 선창에 이어 터진 만세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깜짝 놀라 달려온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만세를 부르며 전진하는 대열을 막으려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으나 만세소리는 계속 퍼져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고 유관순은 일본 헌병들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일본 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 나서 유관순은 공주와 서울에서 재판을 받았다. 마침내 7년의 징역형이 내려지고 유관순은 감옥에 갇혔다. 그렇지만 나라가 독립해야 한다는 유관순의 신념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유관순은 모진 고문을 당하여 몸이 몹시 쇠약해졌지만, 옥중에서도 끝까지 항거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열 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유관순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히 우리 겨레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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