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때문에 파주출판도시에 다녀왔다. 그곳 초입을 지날때면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몇 해 전, 봄을 알리는 비가 지나간 스산한 저녁이었다. 출판도시에서 일을 보고 차를 몰아 자유로에 진입했다. 어지럽게 널린 파편 사이로 찌그러진 승용차 몇 대가 보였다. 추돌사고가 발생한 듯했다.
맨 앞 차량에서 허리가 조금 굽은 어르신이 걸아 나와서는 다른 차량 운전자와 잠깐 얘기를 나눈 뒤 곧장 조수석으로 달려갔다. 승용차의 파손 상태는 살피지도 않았다. 더 시급한 것이, 아니면 더 소중한 것이 있었던 거다.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건 그다음 장면이다. 어르신이 내린 차량의 뒷좌석에서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몸을 웅크린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잠시 뒤 어르신은 문을 열어젖힌 다음 두 팔을 벌려 할머니를 살포시 안았다.
그 모습은 마치 "세월이 흘렀지만 난 여전히 당신을 염려하오"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달쯤 지났을까. 마음이 통하는 지인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안주가 떨어질 무렵,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가 옮겨갔다.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하는 친구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불온한 상상을 하게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상대의 '낮'은 물론이고 상대의 '밤'도 갖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법이지. 때론 서로의 감정을 믿고 서로의 밤을 훔치는 확신범이 되려 하지. 암, 그게 사랑일 테지."
철학 서적을 주로 기획하고 출간하는 출판사 사장은 이런 이야기를 보탰다.
"흔히 말하는 '썸'이란 것은,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는 '확신'과 '의심'사이의 투쟁이다. 확신과 의심이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하는 법이지. 그러다 의심의 농도가 점차 옅어져 확신만 남으면 비로소 사랑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죄다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남 얘기하듯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여러번 고개를 끄덕이다 웃다 했다. 술자리가 파할 즈음 엉뚱한 질문 하나가 내 머릿공을 헤집어 놓았다.
'그럼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을 가르는 기준은 무지?'
순간, 교통사고 현장에서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꺼안던 모습이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릿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난 무릎을 탁 쳤다. 그래, 할아버지가 그랬듯, 상대를 자신의 일부로 여길 수 있는지 여부가, 진실한 사랑과 유사類似사랑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지도 몰라.
사랑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다. 사랑을 함부로 정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말해 사랑이 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보았던 노부부의 모습을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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